비평

「순환과 지속의 진회색 유머」, 오정은

신용진 《공기색 입자》:

순환과 지속의 진회색 유머

 

신용진 《공기색 입자》: 순환과 지속의 진회색 유머

신용진 《공기색 입자》: 순환과 지속의 진회색 유머 오정은(미술비평) ⊘ ‘문제적 전시’ 논쟁의 수사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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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은(미술비평)

 

 

‘문제적 전시’

논쟁의 수사를 붙이며 신용진 개인전 《공기색 입자》에 관한 글쓰기를 시작한다. 《공기색 입자》는 작가 신용진의 신작을 공개해둠과 함께 박서보의 <묘법>연작을 소환해 파란을 일으킨다. 한국 모더니즘 미술 진영의 선봉이자 단색화 열풍의 오랜 주축에 있던, 이어 지난해 고인이 되어 미술사의 자취가 된 故화가의 명작을 신용진이 전유했다. <묘법>을 닮은, 오마주한, 패러디한 듯한 것들이 전시된다. 신용진의 모의는 8년 전 시작되었다.

 

당시 20대 중반의 신용진은 박서보 화백의 스튜디오에 고용된 일꾼 중의 하나였다. 십여 명의 일꾼들은 각자 역할을 나눠 <묘법>을 연구했다. 한지를 여러 장 배접하고 색을 이염하고 표면을 문질러 요철을 내 문지르고 다듬는 일련의 과정이었다. 신용진은 사포 담당이었다. <묘법>의 부산물이 생겨 쌓이고 쓰레기와 섞여 버려지는 것을 여러 날에 걸쳐 보았다. 그는 생각했다. “‘묘법’이 되지 않은 애들은 ‘탈묘법’인가, 아니면 ‘묘법’을 거꾸로 해 ‘법묘’인가?” 그리곤 그 ‘탈묘’인지 ‘법묘’인지 하는 것들을 몰래 모아두었다.

 

엉뚱한 역발상과 반전된 기호, 가벼운 언어유희. 이것은 작가 신용진이 자주 사용하는 작업 및 작명 방식이다. 전시《563》(2023) 및 해당 전시에서 소개한 <원 자른다, 또는 기레쓰>는 각각 ‘(일 년)삼백육십오(일)’, ‘쓰레기는 또 다른 자원’을 바꾼 것이었다. 《유일무이의 수》(2022)에서는 눈물 이모티콘으로 쓰이는 모음 ‘ㅠ’를 따라한 설치작품을 선보이는가 하면, 숫자 암호문 같은 기호를 만들어 족자에 썼다. 이때 사용된 규칙성은 아날로그 숫자와 디지털 숫자를 사용해 그가 만든 것으로 이번 개인전 <순환의 수>에서도 사용됐다. 신용진이 살아가는 일상적과 노동환경으로부터 근거한 다분히 실증적인 배경 소재도 반복적인데, 신진작가 및 미대생으로서 회화 안료의 기초 물성 개념을 탐구한 《캔버스와 물감의 관계》(2020), 미술학원 운영 후 폐업자로서 남은 집기류를 오브제로 전시한 《이미지 되지 못한 이미지》(2020), 환경미화원으로 일한 시간과 잔상을 사진, 설치 등으로 푼 《저편의 양》(2022), 졸업논문심사에서 탈락하자 해당 논문을 뒤집어 인쇄해 텍스트를 이미지로 바꿔 전시한 《이것은 논문이 아니다》(2024)등이 대표적으로 그랬다. 신용진은 그룹전시에 참여하기보다 이력 상당을 개인전으로 채웠고, 각 전시에 제 딴의 선형적 순서와 점진적 이야기를 염두에 두기도 했다. 신용진에 의하면 이번 《공기색 입자》는 원래 《저편의 양》이전에 등장했어야 하는데, 전시 지원 공모사업 선정 여부에 따른 변수로 이제야 선보이게 되었다.

 

그런 이유로 올해 신용진이 《공기색 입자》에 함께 더하며 「친애하는 학장님께」(박서보 화백에 대한 편지)는 이제는 부재하여 부칠 수 없는 상대를 향하게 됐다. 전시기획자의 권유로 쓴 이 대체로 정감어린 편지 속 자못 가미된 무심한 듯, 무지한 듯, 당돌한 문장을 일부 옮겨 적자면 다음과 같다. “묘법을 드러내기 위해 필연적으로 사라져야 하는 친구들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이거 만들어 놓고 욕먹을까봐 살짝 두려워도 그런 거 두려우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거 같아요. 할아버지도 살아생전 욕 많이 들으셨는데 하셨잖아요. (...) 얘네들을 보며 우리 인간을 상상해 보게 돼요. 한번 찾아뵐게요. 저도 사실은 학교에서 근현대미술사를 배울 때 강사쌤들한테 안 좋은 말로 당신을 배웠었어요. 그렇지만 쌤들의 시간과 제 시간도 다른 시간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 인물인 선생님을 볼 수 없었어요. (...) 계단에서 넘어지시면서 어린아이같이 웃던 선생님이 기억납니다. 그냥 미술 덕후세요. (...) 새로운 여행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어요. 퍽이나 저에게 관심도 없으시겠지만요. 애들이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 많이 받아하더라고요. (...) 응원해 주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신용진은 박서보 <묘법> 제작 단계 중 탈각된 종이 먼지, 반죽 뭉치 등을 모아두었다가 그를 채반으로 걸러 가루로 만들었다. 그는 기존 <묘법>을 여러 겹의 닥종이가 더해져 뭉쳐지면서 입체 양각이 강조된 것으로 보았고, 그렇다면 자신은 종이를 부수고 분해하는 음각의 실험을 해보기로 계획했다. 그는 그런 행위를 입증하는 실제 물성의 것들을 <법묘 혹은 탈묘법>(2024)으로 이름 붙였고, 이들 진회색 덩어리에서 걸러진 고운 입자는 <묘법>식 마티에르가 있는 <원형의 양각>, <원형의 음각>, <N개의 질료, 또는 물질>, <공기색 입자_평면>(2024)등의 기호를 채색하는 데 쓰였다. <원형의 양각>은 다섯 가지 원소인 금(金), 수(水), 목(木), 화(火), 토(土)의 한자 유색으로 표기하고 있으며, <원형의 음각>은 해당 문자를 가로 반전하고 무채색으로 표기했다. 작업에서 오행 기호의 등장은 신용진이 쓰레기 수거와 소각의 노동을 경험하고 그를 전시로 푼 《저편의 양》에서 먼저 시작되었는데, 월화수목금토일의 노동 주기를 뜻하면서 물질의 순환을 은유한 거였다.

 

신용진은 물질을 작게 해체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미세한 입자, 원자의 존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자전적 현실 이슈에 주역(周易) 등 고대철학이 부분 베여있던 신용진의 세계관은 <법묘 혹은 탈묘법> 수행을 계기로 양자역학과 같은 미시세계 물리학 까지 첨가되었다. 묘법에서 탈락한 입자와 마이크로 홀로그램 글리터를 섞고 전기모터와 과학모빌을 동원한 설치작 <공기색 입자_입체>(2024), 러더퍼드 원자 모형(Rutherford's atomic model)을 묘법 탈락 입자, 글리터로 드로잉하며 원자 에너지를 상징한 <공기색 입자_평면>가 그 변화를 방증한다. 작가는 이어 해당 평면작 정 가운데에 오행 음운(金, 水, 木, 火, 土)을 한 점에 겹쳐 쓰며 철학적·과학적 사고를 한 데 투영코자 했다. 큰 자작나무 합판을 태극무늬에 맞춰 나눠 자르고 그 극점 중 하나에 묘법에서 탈락한 입자를 더한 <N개의 질료, 또는 물질>(2024)은 신용진이 청취한 단색화가의 생전 지향이면서 아직 오롯이 공감되지는 않은 영역, 그리고 이번 전시의 숨은 제목 공(空), 기(氣), 색(色)이자 신용진이 앞으로 연결 짓고 연구하고자 하는 바람을 모두 포괄한다고 할 수 있겠다.

 

신용진은 문제적이고 개인적이다. 그의 사상이 사고와 틀로 옮겨가는 과정은 한 번에 이해하기 힘들고 주관적이다. 기관과 연관된 제도 미술의 범위 안에 있으면서 때때로 그는 트러블메이커로 충돌하는 상황을 반복적으로 비추기도 했다. 심지어 그는 논란의 화두 옆에 있으면서도 입장을 유보하고 소재주의에 탐닉한 뒤 지식과 관념 탐구의 중성지대로 결론을 낸 것 같아 보이는 측면도 있기 때문에 더욱 어렵다. 그가 쓴 「친애하는 학장님께」 중에 “학교에서 근현대미술사를 배울 때 (...) 그렇지만 쌤들의 시간과 제 시간도 다른 시간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 인물인 선생님을 볼 수 없었어요.” 라는 글귀는 전술한 견해를 뒷받침하는 동시에 작가와 얼핏 동세대 군상의 일면을 표상하는 것 같아 보인다. <묘법>의 시간을 수행한 미술노동자로서 자신을 밝히고 작품을 전유했으면서 박서보에 관해 “그냥 미술덕후세요.”라고 결론 내는 식의 정도는 비판적 태도의 결여, 책임의식이 부재로 《공기색 입자》를 보게 할 소지도 있다. 그러나 여러 해 지켜보건대, 신용진의 언어는 점차 분명한 어조로 자신의 특질을 말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다. 그의 말은, 그가 직접 스친 환경의 버려지고 남은 것들을 모아 하는 발표를 통해 점진적으로 노출·배양되는, 일종의 블랙 유머가 아닐까 싶다. 쌓인 뒤 진정 형태를 갖춰 발화되는.

 

필자는 전년도에 신용진 관련 글을 요청받아 쓰면서 본문 제목을, 올해 전시에 직관적으로 드러난 태극의 문양 개념과 같이, ‘순환하는 삶과 지속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라고 붙인 바 있다. 오늘 쓴 글에도 비슷한 제목을 붙일 수 있을 것 같다. 신용진의 작업은 순환과 지속의 가능성을 말하는 블랙 유머라고. 아니 일단은 진회색빛 유머라고 해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