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펼친 손에서 시작하는 이야기」, 콘노 유키

펼친 손에서 시작하는 이야기: 신용진 개인전 《6의 홍반도》

 

콘노 유키(미술비평)

 

 

1.   손에 손잡고?

 

신용진의 개인전 《6의 홍반도》(아트플러그 연수, 2025)에는 손이 많이 등장한다. 여러 개 나열된 붉은 손(<일의 홍반도> 시리즈, 2025), 패턴으로 반복되어 찍힌 손(<오륙삼의 양> 네 점, 2023), 악수를 하려는 듯이 건넨 마네킹의 장갑(<양방의 군상>, 2022), 그리고 보이지 않지만 작가가 셀카를 찍었을 때 카메라를 들던 손(<습기의 자화상>, 2022). 그러나, “손이 많이 등장한다”는 묘사는 사실 정확하지 않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손이었던 또는 손이 있었던 흔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손 자체가 아닌 손의 흔적은 무엇을 나타낼까. 신용진이 손의 흔적을 작품으로 보여줄 때, 그것은 손의 노동적 역할만 표현하지 않는다. 작가가 미화 용역에서 일한 경험에 비추어 보면, 그렇게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손의 흔적은 노동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신용진의 작품에는 주장과 증인의 상징성이 있다. 절기를 따라 네 개로 제작된 <오륙삼의 양>(2023)이 암시하듯이, 손을 찍는 행위는 노동을 대변할 뿐만 아니다. 마치 역사 자료에 나타난 선언문이나 연예인이 써 준 사인처럼, 이들은 발언할 힘의 무게를 손(의 흔적)에 싣고 있다. 여기에 내가 있(었)다는 증거 자료적 속성은 ‘익명의 노동자’라는 포괄적인 분류에 맞서는, 개개인임을 주장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일의 홍반도>의 손들은 ‘손에 손잡고’ 노래하는 모습처럼 보였다가도, 날이 바뀌고 요일이 바뀌는 야간에 일하는 노동자를 개별자로 가시화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   추에 가장 가까운 미, 미에 가장 가까운 추

 

<일의 홍반도>를 자세히 보면, 손은 두 요일을 나타내는 한자가 합쳐진 글자에 중첩되어 있다. 청소 노동자의 손은 경계를 넘어선다. 날이 바뀌는 시점에 일함을 의미하는—마치 충성심을 담아—손자국은 낮과 밤을, 그리고 미와 추의 경계를 넘어선다. 이들에게 노동은 낮 시간대에 기반한 ‘나인 투 식스’의 업무 시간을 벗어난다. 또한 이들은 ‘미화원’이라는 이름으로 ‘추’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다. 밤에 쓰레기를 모으면서 도시의 청결함을 유지하는 이들은 미관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일의 홍반도>에 나타난 손은 미화를 실현한 당사자임을 주장하지만, 일회용 고무장갑으로 나타난 손 모양은 고되고 힘든—아름다움의 대척점에 놓인 노동임을 보여준다. 심지어, 반복된 고무장갑은 이들이 일시적으로 고용되거나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신용진의 작업에서 손은 한 사람임을 주장하는 동시에, 그것이 반복된 노동과 대체되는 노동력임을 아슬아슬한 균형 위에 보여준다. <일의 홍반도>를 자세히 보면, 미화 노동자가 쉬는 ‘토-일’은 비어 있다. 그들은 쉬지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우리가 잠든 밤의 골목에서 일할 때도 보이지 않는다. 청소 노동자의 노동은 낮에도 보이지 않고 밤에도 (우리가 밖에 나가지 않는 한) 보이지 않는다. 깨끗함이라는 (비)시각성 안에서 신용진의 작품은 추에 가장 가까운 미이자 미에 가장 가까운 추에 손을 뻗는 이들을 가시화한다. 

 

 

3.   보이지 않는 손

 

신용진이 복사+붙여넣기의 형식을 가지고 오면서도 이모티콘처럼 기호화된 손 대신 각각 다른 손자국을 ‘찍은’ 표현을 선택한 이유란, 밤에 일하는 노동자의 개별 존재를 가시화하여 이들의 목소리를 보여주기 위함만은 아니다. 전국을 덮을 정도로 찍힌 손바닥은 (비록 개수가 통계 자료에 기반하지 않았더라도) 누가 찍은 것일까. 노동자들 스스로 찍었다는 생각도 잠시, 이들에게 일임한 자들이 있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신용진의 작품에서 손은 사회 이면에 숨은 노동을 말해 줄 뿐만 아니라, 주야의 이미지를 오가면서 청결함을 유지하기 위해 타자에게 손이 더러워지는 일을 밀어붙이는 또 다른 손의 존재를 가시화한다. 얼룩처럼 남은 손자국은 적극적인 발화인 동시에 뒤에서—옆에서 이들의 손을 잡고 얼룩지게 한 또 다른 손이 있음을 암시한다. 노동하는 손과 노동하지 않는 손이 교차한다는 점에서 신용진의 작품은 ‘보이지 않는 손’의 위치를 낮과 밤을, 양지와 그늘을, 그리고 지상과 지하(인프라)를 오가는 손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한쪽에는 힘들게 노동하는 손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내 손이 더러워지기 싫어 남에게 맡기는 또 다른 손이 있다. 자국을 남긴 수많은 손은 그들의 목소리인 동시에 그들 배후에 있는—청결한 낮을 보내는, 지상에 있는 우리를 향해 내보인다—보세요, 이 손은 당신들이 일임하여 더러워진 손입니다. 

 

 

4.   시각을 거슬리게 하는

 

그리하여, 우리는 도시의 청결함에 청결함을 만들어 준 이와 청결함을 강요하는 이의 두 유형을 손자국에 보게 된다. 유지되는 청결함은 길가에서 시각적인 아름다움으로 간주하는데, 아름다움에 가장 가깝지만 추한 이 접촉은 미화원에게 맡겨진다. 신용진이 <미대칭변초경>(2021), <습기의 자화상>(2022)과 <현철, 복석, 석춘>(2022)에서 렌티큘러를 쓴 이유는 주야의 대비, 또는 있는 듯 없는 듯한 노동자의 존재를 보여주기 위함이기도 하겠지만, 청결함이 전제하는 시각 중심적 성격을 거슬러, 거슬리게=신경 쓰이게, 걷어내고 싶게 하는 데에 있지 않을까. <미대칭변초경>에서 우리는 작품 앞을 지나가면서 트릭아트처럼 시각적 변화를 즐기다가, 쓰레기 처리장의 한 장면임을 알게 된다—하지만, 이내 시야에서 사라진다. 렌티큘러 앞에서 쓰레기가 시야각에서 사라지는 것은 일시적이지만, 길거리의 청결함 또한 일시적이다. 그 찰나—즉 사라지고 없음을 보여주는 렌티큘러는 유리와 달리, 가려주는 시각적 효과를 발휘하기도 한다. 불투명한 시각장은 잠시 우리 시야에서 더러운 대상을 벗어나게 한다. 동시에, <일의 홍반도>의 공사판의 방음/방진벽을 연상시키는 설치 방식처럼 보호막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신용진은 렌티큘러라는 재료를 통해서, 시야를 가리는 상태에 내재하는 억압과 보호의 이중성을 보여준다. 렌티큘러를 통해 보는 이미지는 찰나로 인식되는 대상인 동시에, 미와 추가, 시각과 접촉이 만나는 지점으로 부각된다. 오염의 부재라는 (비)시각성이 청결함과 아름다움을 증명한다면, 그의 작품은 이 (비)시각성을 시각 작업으로 건드린다.

 

 

5.   순환하면서도 남겨지는 것

 

쓰레기가 재료로 사용되는 것은 미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신용진의 작업은 쓰레기를 소각하고 다른 자원으로 활용하는 현실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린 이야기이다. 이를테면, 그의 작업은 쓰레기의 심미화가 아니라 쓰레기를 자원화하려는 현실에 비롯된 것이다. ‘쓰레기는 또 다른 자원’이라는 문구를 뒤집은 <원 자른다, 또는 기레쓰>(2023)라는 작품에서, 그의 말장난은 단지 재미에 머무르지 않는다. 짧은 한 문장이 언어유희임을 알면서도 말이 안 되는 구석—‘원 자른다’? ‘기레쓰’?—을 남길 때, 의미로 환원되기 어려운 잔여로 나타난다. 이 잔여는 쓰레기 처분장을 찍은 영상 <사물이 불타는>(2022)에도 나타난다. 엄청난 양의 쓰레기는 얼마나 제대로 자원으로 활용되는 것일까—이처럼, 믿기지 않는 시각적 충격이 여기에 있다. 이 충격은 처리장의 스펙터클에 휘말리지 않고 남겨진다. 그동안 신용진의 작품에서 음/양 또는 이/기의 순환을 보이는 대등한(‘=’의 부호를 통한) 관계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일대일로 대응하여 맞물리거나 맞아떨어지는 결과, 즉 합일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일의 홍반도>가 사실상 서울을 제외한 지역을 보여줄 때, 쓰레기 매립장이나 소각시설이 수도권에서 외곽으로 이전하는 추세를 시사한다. 말이 안 되는 구석은 언어유희상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현실의 물리적 공간, 바로 주변부로 책임을 넘기는 ‘님비(NIMBY—Not In My Backyard)’ 현상의 단면을 보여준다. 중심부의 청결함을 외곽이나 지방으로, 말하자면 양지에서 음지로 책임을 넘긴 움직임을 보여주면서, 순환이나 재활용, 더 나아가 (종종 말하는) ‘지속 가능한’ 경제 안에 내재하는 불균형을 잔여의 형태로 보여준다. 

 

 

6.   투명은 투명하기만 하지 않다.

 

이 맥락에서 <양방의 군상>과 <습기의 자화상>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입체, 하나는 렌티큘러 작업인데, 둘은 투명한 인간의 모습을 보인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어쩌면 ‘일상에 보이지 않는’ 존재를 가시화하였다고도 볼 수 있는 두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그 존재가 대개 대체 가능하다는 점이다. 마네킹을 사용한 <양방의 군상>은 미화 노동자의 옷과 장갑 차림이다. 마네킹은 입(히)는 옷에 맞춰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미술 작가’ 신용진이 셀카로 찍은 <습기의 자화상>은 추운 겨울에 입김이 얼어붙은, 미화 노동자로 일하던 어느 날의 모습이다. 작가는 하필 ‘성에’라는 말 대신 ‘습기’라는 말을 썼을까. 성에가 낀 안전모만 남기고 시야에서 신용진의 모습이 잠깐 사라질 때, 작가는 습기처럼 증발하고 작품은 성에처럼 남아 있다. 신용진의 작품에서 투명한 인간의 모습은 쉽게 대체되는 육체노동과 대체되기 어려운 창작자의 지적 노동 사이를 오간다. <양방의 군상>이 건네는 장갑을 낀 손과 셀카를 찍은—그러나 화면에 나타나지 않은 손은 여기서 만나 악수한다. 미와 추가 가장 가까이서 만나는, 시각과 접촉의 만나는 지점에서, 신용진은 도시의 숨은 이면을 들여다볼 기회, 더 나아가 ‘쓰레기도 이제는 작품’이라는 단순한 환원 논리에 휘말리지 않은 자세를 찾는다. 투명은 투명하기만 하지 않다. 무엇이든 되거나 휘발되어 사라지는 순환고리 안에서, 그는 더듬듯이 노동자/작가의 정체성을 조명한다.